금강경 법문

음력 14년 6월 15일 보름 법회 - 금강경 8회 법문

검뎅군 2014. 7. 14. 17:03

지난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금강경 법문을 이어 가겠습니다.

 

``'세존 선남자 선녀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어느 구절을 하는지 책자가 없으시니까 못보고 계시는데

다음 초하루 법회 때는 금강경을 한 권씩 보실 수 있게 준비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여기서 세존이시어 라고 호칭을 하시는 분은 `'보리존자’ 시죠

보리존자는 해공 제일의 수보리 존자

공의 이치를 가장 많이 깨치신 부처님 제자 이십니다.

불교 경전은 그 해당되는 제자 내지 선문승들이 부처님께 여쭙고 또 부처님이 답변하는 이런걸로 모든 경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실제적으로 이 불자님들께서 불심이 진득이 되고 부처님 가피나 신중의 위신력이 감응이 되실수록 그러한 것을 과묵하고 그러한 것에 함위 찬탈 하실 때 날로날로 증강이 되실 때 신심은 자연히 따라오는 결과물에 지나지 않고요

마음으로 신심을 내야되겠다 불심을 증득 해야 되겠다 하는 것도 결국은 걸림입니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 자체가 걸림이예요 무엇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마찬가지 인데

활시위를 너무 당기게 되면은 무엇이 끊어질까요?

화살이 나가기도 전에 활대나 줄 자체가 끊어져 버리겟죠?

부러지거나 끊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불교를 증득해 나가실 때 절을 하던 염불공덕을 하시던 법문을 들으실때 본인의 처한 상황에 맞게끔 하시는게 좋습니다.

“아 부처님 앞이니까 경건하게 내가 다리가 아픈데도 무릎 꿇고 내가 이 법문을 잘 들어야 되겠다.” 하는 것은 분별심에서 보면 굉장히 고매한 불심 같습니다만은 실상은 자기 신체를 해치게 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불심을 증득해 가는 과정은 반듯이 단계단계 차례차례 밟아 올라가서야 가피력도 더욱더 많이 증득 시킬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선남자 선녀인 이라는 하는 것은

우리가 착할 선짜를 써요 남자는 다 아시죠?

여자도 다 아시죠?

앞에서 선짜를 붙이는 것은 거룩하는 것이예요

착할 선짜를 쓰는데요 착할 선짜는 거룩함도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가집안에서 부처님 제자들이 칭을 하던 부처님이 호칭을 하시던

모든 대중을 일컬어서 선남자 선녀인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것이 근자에는 우리가 결혼하는 이성간에 결혼하는 남녀를 가르켜서 선남 선녀라고 그러죠 이게 불경에서 나오는 얘기예요.

우리 불자님들이 살아가시면서 쓰시는 수많은 언어가운데에서 외국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들이 영어를 쓰고 이태리어를 쓰고 스페인어를 써도

그 어원의 근원은 자기들이 만든 것 같지만은  실상은 이 불경에서 다 각색이 되어서 나가고 있다 하는 거죠

그래서 수보리 존자 께서 세존에게 여쭐 때

세존이시어 도대체 수많은 거룩한 남자와 수많은 거룩한 여자들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아’자라는 것은 `무’ 없을 무자예요

이것은 더할 나위 없다 그냥 물질이 있다 없다의 개념이 아니라 추상적인 부분에 있어서 비교할 바가 없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바가 없다는 뜻 이예요

다음 뇩다라

뇩다라라는 것은 우리가 최상이라는 말을 많이 쓰죠?

위에중의 위에를 두고 최상이라고 하죠?

다시 말해서 최고라는 뜻입니다.

최상 최고 라는 뜻이예요

삼은

바를 정자를 얘기합니다.

우리가 투표소 가면은 표 얼마나 받았나 할 때 받을 정자를 많이 쓰죠?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숫자 단위가 바를 정자를 쓰면 5개이기도 하지만

바를 정자는 공정함을 뜻하는 것이예요 이 투표는 공정하게 이루어 진다.

우리는 투표를 공정하게 한다. 바르게 한다 속이지 않고 바르게 한다 .

이런 것이 모두 내포되어 잇는 것이예요.

`먁’이라는 것은 두루 하다는 얘기예요

전 우주에 꽉 차있어서 비어 잇는 곳이 없다.

그 꽉 찬 것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할까요?

보편 타당성을 가지고 우리는 꽉 찼다고 하지요?

우리가 세속적으로 살아 가실 때 보편 타당하다는 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두루뭉실 하게 넘어갈 때 우리가 보편 타당하다는 말을 자주 해요

이것을 근원적으로 보면 이쪽도 저쪽도 다 받아들이니까 어때요?

어떤 틀을 가졌을 때 양변으로 나누게 되면 반분이 되게 되는 데 이것은 갈등과 번뇌가 되지요?

우리 불교의 사상은 원흉사상이다 모두를 포함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보편타당이다 이것도 받아주고 저것도 받아주니 어때요?

꽉차는 것이죠.

이해가 가시죠?

일반적으로 그냥 보편타당하는 말씀을 불자님들은 평상시에 아주 쉽게 사용들 하시지만은

사실 이 보편타당성은 우리 불교 사상의 정수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흉사상을 나타내는 것이고요 평등을 나타내는 것예요.

위 아래도 없고 평등 똑같다.

늘 말씀드리지만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고 죽는 것은 죽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는 것은 죽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사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일체의 평등심이예요

그래서 먁이라는 것은 불공평한게 없다.

공평하다 평등하다 평등하기 때문에 가득찼다. 두루하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서 이것은 등 이예요

`먁’은 등이다.예요

그 다음에 `삼’이라는 것은 정. 올바르다는 뜻 이예요

올바르다는 뜻은 모예요?

 틀림없다는 뜻도 되는 것 이예요

올바른 것은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을 올바르다 하잖아요.

`보리’는 깨달음. 깨달음을 보리라고 해요

깨달음은 한자로 각입니다.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줄여서 깨달음인데

지금까지를 다 이으면, 우상정등정각 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더할나위 없이 비교할바 없이 올바르게 원흉하고 올바르게 깨치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다.

이제 다들 이해 가시죠?

이것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세존이시어 선남자 선녀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이를 깨닿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는 것이지요.

거룩한 남들이나 거룩한 여자들은 이런 우상정등정각을 깨우칠 마음이 생겼다.

이것을 줄이게 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빼고 앞뒤 자 합치면 발심이 되는 것이예요

내가 불교를 믿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우리가 뭐라고 하나요?

발심이라고 하지요?

처음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가 초발심 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발심을 일으키는데 그냥 발심이 아니고 우상정등정각을 깨치겠다는 발심이예요

부처님이시어 거룩한 남자들이나 거룩한 여자들이 이런 더없이 원흉 무애한 깨달음을 얻는 마음을 일으킬 때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이라.

도대체 이 발심이 아침 저녁 잠자다가도 하루에 수없이 마음이 변하고 번뇌망상으로 죽끓듯 하는데

도대체 이 거룩한 발심을 어떻게 머물러야 되겠습니까?

응운하주 하는 것은 어떻게 머물러야 되겟습니까?

운하항복기심이다 하는 것은 어떻게 죽끓는 변덕스런 마음을 항복을 받아야 되겟습니까?

하고 묻는 과정이예요

그런데 우리 불자님들은 스님에게 그런 얘기들을 하나도 하지 않아요.

제가 부처님만큼 깨달치는 안았어도 부처님 공부를 쭉 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왜 질문들을 안하시냐 이거예요.

저에게 질문들 많이 하세요

 

그래서 발심이라는 것은 어떤것인가요?

믿는 다는 마음은 신심이예요

우리가 발심과 신심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발심 수행해서 깨달았을 때 신심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 발심이라는 얘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내인생을 후회없이 걸어가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마음이 발심입니다.

발심을 어떻게 하느냐에 다라서 수행을 해나가는 이력이 달라집니다.

불자님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신년 새해 하루가 되면은 일년 계획을 세우죠?

지키신분 계신가요?

한분도 없으시죠?

그러면 근본이 왜 그랬을까요?

바로 발심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발심이 잘 못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본인이 생사를 여탈할 정도의 애절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결심을 했는데 발심을 했는데 마음을 일으켰는데 그것을 안 지켜도 그만입니다.

당장 숨쉬는 데 지장 없고,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되느냐 하면

자꾸 탕심 망상 번뇌 이런 것만 가득 차게 되는 것이지요

올바른 발심이다 하면 그래 내가 나의 성공을 찾아나가는데

내가 내일 이 육신을 벗더라도 오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나의 성품을 반듯이 찾고 말겠다.

생사를 도외시한 발심이 되면 그분은 그 즉시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여기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물론 깨치고 보면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깨치고 보면 깨친다는 것도 잊어야 합니다.

왜냐? 깨쳐야 하겠다 하는 것도 걸림이요.

내가 깨쳤다 하는 것도 걸림이지요.

다시 말씀드려서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것은 바꾸서 말씀드리면 대자유입니다.

자만이나 방종이 아니라 대자유.

대자유를 얻었을 때 나와 남이라는 의식이 없어지고

너다 나다 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남자다 여자다 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옳다 그르다는 개념이 없어지고 돈이 있다 없다라는 개념이 없어져요

없어지는데 그 없어지는 세계가 모두를 가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생각 내 행동을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무상정등정각이면 무엇합니까?

우선 가장 기초적으로 내가 나라하는 착각속에 살고있을때는 내가 지금 불자님들에게 일러드린것은 궁극적인 목표점이고 수학에서 얘기하면 꼭지점이고.

걸어가는 과정에서는 그 꼭지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집작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꼭지점을 향해서 일단은 증득을 해야 꼭지점에 도달 할 수가 있겠지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내 생각이나 내 행동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죠?

우리가 선업을 쌓고 악업을 쌓는 반초적인 증거들이 무엇인가요?

일거수일투족이지요?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요?

자식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치면서 우리 보살님들은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게 사시나요?

바로 이것을 항상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수행이고 절에 나오는 이유입니다.

법문을 듣고 머리속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따라서 무상정등정각이다 하는 것은 바꾸어 이야기 하면 내행동 내생각을 어떻게 하고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세계적인 철강회사 카네기 제단이라고 있습니다.

이 카네기라는 돌아가신 고인께서는 미국 하버드 스탠버드 MIT 공대 출신이 아닙니다.

초등학교도 다니다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린나이에 본인이 살고 잇는 철공소에 일찍이 취직을 했습니다.

뜨거운 용광로에서 작업하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발심을 합니다.

“내가 이회사의 공장장이 될때까지 내가 절대로 퇴근후에 바에 들리지 않겠다”

라는 발심을 하게 됩니다.

이 철강일이라는게 굉장히 힘이 듭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게 되면 몸도 지치고 뜨거운 열기에서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퇴근후 간단히 피로회복을 하고 정신적이나 육체적에 도움을 주기 위해 독한 위스키를 한잔을 하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인 불문율 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카네기만은 내가 공장장이 되기 까지는 절대로 바에 들르지 않겠다.

본인은 하버드 출신도 아니고 근면성실과 내 스스로 나를 이기는 힘이 없이는 절대 내가 이 회사에 공장장이 될수 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에가서 철강에 대해 공부를 합니다.

? 공장장이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미쳤다고 그러죠. 회사에 인재가 넘치고 넘치는데 초등학교도 졸업 안 한 사람이 무슨 공장장을 꿈꾸겠습니까? 누가 그러면 미쳤다고 그러겠죠.

하루는 카네기 생일 이였는데 같은 절친한 직공이 말합니다. 자네가 바에 안가는 것은 알겠는데

오늘은 너의 생일이니까 내가 친한 친구로서 내가 바에서 한잔 살 테니 오늘 딱 하루만 내 마음을 받아 줘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퇴근 무렵에 카네기가 거절을 합니다.

친구에게는 딱 한번이지만 그 딱 한번이 내 인생 남아있는 모든 인생이 걸려 있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로부터 20년후 카네기는 공장장이 됩니다.

친구는 2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말단입니다.

어떠십니까?

발심이라는 부분에 울림이 생기십니까?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의외로 쉽습니다.

지나가다 콩을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 드리는데

불자님들께서 수행이라는 것이 너무 세게 당기지도 말고 느슨하게도 당기지 말라는 것은

변함없이 하시라는 것입니다.

또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어제보다 오늘이 더 불자 다우셔야 하고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불자 다우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에서 수행이고 증득이고 아뇩다라삼욕삼보리로 가는 길이고 선문각을 이루는 길이고 보살을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들은 `작심삼일’을 고사하고 `작심법당’ 입니다.

법당에서 나가는 순간 하얘지시죠..

누가 옆에서 시비만 걸어도. 운전 중 누가 가로막기만 해도..

바로 튀어 나오죠??

따라서 우리 불자님께 이 불전에서 다짐 하시는 것을 100% 하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못하니까요 깨달음을 얻지 않고 그 선상에 들어선 사람이 아니고서는 발심을 행동으로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침에 일어나셔서 세안하러 화장실 가셔서 거울에 대고 결심을 하십시오.

부처님의 얼굴은 32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32종호 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32가지로 변하시기 때문입니다.

32가지 상호 가운데서 나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자님들이 수행을 하시게 되시면 부처님의 32가지 상호는 못 따라 가더라도

한가지 상호만 따라가세요

웃는 얼굴 입니다.

아침에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거울을 보시고 하루를 발심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루도 괜찮은 모습으로 살자.

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내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을 해야겠느냐 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런 수행을 바로 해 나갔을 때 비로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자님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법당에서 수행을 하시던 집에서 수행을 하시던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화두를 가지시고 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하나하나가 수행 아닌 바가 없습니다.

한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해 나아 가시길 바랍니다.

성불 하십시오.